『모르는 이야기』

팬다 뭉갠다 잘게 부순다 가루로 만든다 뼛조각도 남지 않게 한다 아무 추억도 떠오르지 않게 한다 그러나 결국 재조립이 되는 것은 내가 생명이기 때문이리라 다시 달라붙어 하나의 육체가 되는 것은 하찮은 생명을 이어나가기 때문이리라 모래가 녹아 유리가 되는 것처럼 심장 속 불꽃이 몸을 녹아내기 때문이리라 수많은 기억으로 번민하게 된다 한 인간의 형체가 된다...

사라진다 먼지가 되어 흩날린다 아무 것도 없던 것처럼 나부낀다 그리하여 홀로 남는다 잊힌다, 잊는다 떠나간 이름을 지운다 네 이름을 잊어서 미안해 사랑했던 시간을 비워내서 미안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에 담아서 미안해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말해서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해서 미안해 마지막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사라진다 먼지가 되어 ...

내겐 이유가 없다 달리 이유가 없다 이 담배곽이 구겨지는 데 이유가 없는 것처럼 사랑이 잊혀지는 데는 달리 이유가 없다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저 당연한 일이다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본다 담배곽에 홀로 남아있던 외로운 기쁨을 태워 본다 내 손에는 분명 프렌치도 있었고, 블랙도 있었고, 레종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어느샌가 사...

그대는 잊혀진 계절을 아시오 빗줄기가 조금 내리더니 아예 사라져버린 계절을 아시오 나 또한 그 계절을 잊어버렸소 이름 따위 잊혀진 계절을 잊어버렸소 내 이름자 묻힌 땅 위를 속살거리는 차가운 바람으로 사라진 계절을 잃어버렸소 그리하여 오늘도 겨울을 맞이하였소 여름보다는 겨울이 좋은데도 어째선지 마음 한 구석이 시리는 그런 나날을 맞이하였소 태초부터 따스함...

별이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저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반사되지 않습니다 별이 보이십니까? 별의 색조가 보이십니까?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 눈에 가득 빛을 담아 주십시오 제가 담지 못하는 만큼 양껏 담아 바라보아 주십시오 제가 반사하지 못하는 만큼 양껏 반사하며 미소 지어 주십시오 예, 저는 분명 보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별도, 별이 모여 이...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하여, 아직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에 원하지 않는 벌레가 내려앉지 않기 위하여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가 있다 장미에는 가시가 있다 사랑이란 이름의 가시가 있다 사랑하지 않음에도 사랑하고, 그런 사랑을 모른척하며 사랑하는 날카롭고 뾰족한 가시가 있다 억지로 쥐려고 하면 손에 박혀 빠지지 않는 가시...

내 눈이 보이는가, 내 얼굴이 보이는가 그렇다면 어서 도망쳐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쳐라 그리 하지 않으면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모든 생명이 끝날 시간만이 존재하리라 내 목소리가 들리는가 기쁨으로 가득찬 절망이 들리는가 그렇다면 어서 도망쳐라 너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리 하지 않으면 파멸만이 ...

나는 고양이다 이름은 아직 없다 있을 수가 없다 누군가에게 키워진 적이 없으니 나는 고양이다 길가에 틀어박혀 시를 쓰며 산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수가 없으니 나는 고양이다 먹는 것은 늘 부실한데 살은 뒤룩뒤룩 찐 생물이다 누군가에게 보여줄 일이 없으니 나는 고양이다 땅을 조용히 짓밟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는 생물이다 슬픈 도시를 훌훌 떠나버리고 바다로 가고...

장미여, 나의 장미여 다시 한번 향을 내주오 창문을 열고 그대를 맞이하는 한 무능한 시인의 마음에 내주오 겨울에야 그대를 찾는 머저리에게 내주오 장미여, 나의 장미여 그대의 향은 언제나 아름답소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시오 그러니 그대의 신자에게 향을 내주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다가갈 수 없는 한 겁쟁이 시인의 마음에 가득 퍼지게 해주오 그러...

아아, 나는 오늘도 도는구나 아무 의미도 없이 도는구나 뻔한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고 했건만 나는 오늘도 결국 예상대로 흘러가는구나 사만 킬로미터를 날았던 비행기도 쿠알라룸푸르에서 바꿔 탔던 비행기도 결국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날았구나 아무 의미 없는 곳으로 돌아오려 날았구나 아아, 나는 오늘도 도는구나 아무 의미도 없이 도는구나 아무런 흐름도 없는 시...

한때의 내가 한때의 손에 들려 한때의 덧없는 미소로 한때를 칠하고 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물들이고 있다 지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저렇게 미소지을 수 있었을까 나는 또 한 명의 나를 바라보며 의문을 품는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데도 지금과 너무나도 다른 나를 바라본다 다시 한번 미소지을 수 있을까, 이 도화지 속에 든 나처럼 웃을 수 ...

저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이시여,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나의 아버지시여 저를 보고 있다면 부디 굽어살펴 주소서 이 미약한 생명을 보고 있다면 부디 살펴 헤아려 주소서 언젠가 끊어질 생명일지라도 아직은 숨쉬고 있으니, 일말의 슬픔이라도 느끼신다면 부디 굽어살펴 주소서 믿음을 잃어버린 적 없고, 희망을 잊은 적 또한 없고, 언젠가 손에 쥘 발리노르로의 배편...